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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끄적끄적 에세이

[일종의 에세이] Day2. 이별

by _noname 2019. 11. 2.

 

너무 슬픈 단어.

폭넓게 쓰일 수 있는 말이지만, 나의 경우 저 단어를 들었을 때 슬픈 이별부터 떠오른다.

특히 유난히 마음이 감성적이 되는 어떤 날의 밤이거나, 뭔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들으면 더더욱.

이별에 취약한 편이다.

사람이나 사물, 공간, 소속, 단체 가릴 것 없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정이 드는 이 몹쓸 성향 때문이겠지.

어렸을 때는 물건 하나를 제대로 버릴 수 없었다. 아주 사소한 지우개 같은 것조차.

내 물건이었던 기간동안 정이 들어서 떠나보내는 것이 슬픈 것이다.

남들이 봤을 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냥 물건을 쌓아두고 정리를 할 줄 모른다거나 버리기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마음인데. 굳이 나서서 해명하지는 않았다. 해명을 하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자라면서 계속 이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고치려고 노력했다.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고질병처럼 근본적인 습성은 남아있다.

지금도 인형같은 생명체 형태의 사물들은 잘 버리지 못한다. 곰인형, 양인형, 고양이 모형, 돼지저금통 등등 이런 것들.

누가 선물로 준 것들도 잘 버리지 못한다. 그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동차를 바꿀 때도, 이사를 갈 때도 이 고질병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불편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변경 사건이다.

몇 년 전 장롱면허를 10년 만에 살려보려고 중고차를 하나 샀다. 올 뉴 마티즈. 1년 동안 잘 타고 다녔고, 연습이 되었다 싶어 이제 오래 타고 다닐만한 새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새차를 샀다.

새차를 고를 때는 신이 났었는데, 새차를 사고 중고차를 팔려고 보니 너무 섭섭한 거다. 나와 함께 돌아다니던 내 마티즈. 이제는 떠나는구나. 아 그냥 계속 타고 다닐걸 그랬나. 마티즈보다 훨씬 좋은 차가 나에게 올 건데, 나는 너무 슬펐다.

그때는 너무 슬퍼서 새 차가 온다는 기쁨도 없었다.

당시 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면 다들 웃었다. 농담 반인 줄 알았겠지. 근데 나는 정말 슬펐다. 스스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이 정도인데 사람은 오죽할까.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이별 말고, 흔히들 말하는 그 이별이란 것에 정말 취약하다. 사람과의 이별. 내 사람이었던 사람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그 과정이 너무 속상하고, 슬프고, 마음이 시려서 견뎌내기가 힘이 든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한없이 깊었다가 무 자르듯이 잘라내야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가까워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할 수는 있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그렇게 되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되기도 한다. 감정이 상할 수는 있지만 생활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다. 멀어졌다가도 언제든지 다시 연결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연인관계는 다르다. 연인으로써의 관계가 끝나면 그것은 아예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서, 서로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던 사람이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것도 하루아침에. 심지어 인생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게 된다니.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렇지만 다들 잘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그 엄청난 일에 취약한 편이라는 나조차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사람은 한없이 약한데, 또 한없이 강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온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또 그 시기를 잘 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꿋꿋하게 잘 산다.

그래도 이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아무도 슬프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고, 서로에게 작고 소소한 행복을 건네며 따뜻하게 살고 싶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시기가 있고 수명이 있어서 이별은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덜 아프기 위해서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이별에 익숙해질 수도 무뎌질 수도 없다.

나같은 사람이 덜 슬프고 덜 아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별 자체를 좀 더 작고 순하게 만들어야겠지. 이별에도 크기와 성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나의 영향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결국 내가 했던 것들이 이별 후에 나를 치게 마련이다. 나중에 마음에 맺힐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작고 순한 이별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내일부터 그 사람을 못 만나게 되더라도, 이제 못 만날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걸,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할걸 이라는 생각은 안 할 수 있게. 오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행동일 수밖에 없는 원리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잘못하면 그게 언젠가 내 마음에 맺히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말이 안 된다. 피하고 싶다는 건 즐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텐데.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피할 수 없다면 줄여라.

더 좋은 것은, 피할 수 없다면 없애라. 

이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언제나 따뜻하고 싶다.

 

- 2019. 11. 1. 금요일. 20:45. hometown my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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